러프컷 · 파인컷 · 락컷

처음 이어 붙인 편집본이 더 이상 컷을 바꾸지 않는 상태가 될 때까지 거치는 단계의 이름


짙은 녹색 바탕에 왼쪽 끝을 맞춘 가로 막대 네 개가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짧아지고, 가장 짧은 맨 아래 막대만 주황색으로 칠해진 그림

 

러프컷, 파인컷, 락컷은 한 편의 영화가 편집실에서 거치는 단계를 순서대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마지막 단계인 락컷은 영어권 자료에서 파이널컷(final cut)으로 적는 경우가 많아서, 애플의 편집 프로그램 이름과 겹쳐 검색이 한 번 더 헷갈리기도 합니다. 이 글은 러프컷 앞에 놓이는 어셈블리에서 출발해 단계마다 무엇이 바뀌는지 따라가고, 마지막에는 락컷을 누가 확정하느냐는 최종 편집권까지 다룹니다.

 

 

 

 

모든 장면을 이어 붙인 어셈블리

촬영이 끝나면 편집실에는 장면마다 여러 테이크가 쌓여 있습니다. 어셈블리는 이 소재에서 장면별로 쓸 만한 테이크를 골라 시나리오 순서대로 전부 이어 붙인 첫 편집본입니다. 장면을 빼거나 순서를 바꾸지 않고, 그냥 각본에 적힌 대로 놓습니다. 그래서 어셈블리는 대개 완성본보다 훨씬 깁니다.

이 단계의 목적은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찍기로 한 장면이 전부 있는지, 이어 붙였을 때 이야기가 성립하는지, 다시 찍어야 할 구멍이 있는지를 여기서 봅니다.

물론 누가 어셈블리를 만드느냐는 작품마다 다릅니다. 보통은 편집감독이 먼저 붙이고 감독이 그 뒤에 합류하지만, 감독이 처음부터 직접 편집을 맡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편집본은 바깥에 거의 보여주지 않는 내부용입니다.

 

위쪽 긴 회색 막대 안에 주황색 블록 세 개가 띄엄띄엄 놓여 있고, 아래쪽 더 짧은 줄에는 같은 블록 세 개가 순서가 바뀐 채 붙어 있으며, 얇은 선들이 서로 엇갈리며 위아래 블록을 잇는 재배열 도식
장면의 순서와 길이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단계

러프컷에서 장면이 움직이는 이유

어셈블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면 각본으로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문제가 드러납니다. 같은 정보를 두 장면이 반복하거나, 관객이 궁금해하기도 전에 답이 먼저 나오는 식입니다. 러프컷(가편집)은 이 문제를 장면 단위로 고치는 편집본입니다. 장면을 통째로 빼고, 순서를 바꾸고, 한 장면을 둘로 나눠 다른 자리에 놓습니다.

그래서 러프컷의 단위는 컷보다 장면입니다. 이 단계에서 한 컷의 길이를 몇 프레임 다듬는 일은 큰 의미가 없는데, 그 장면 자체가 다음 버전에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면 안쪽의 거친 연결은 대개 그대로 둔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다만 러프컷이 한 번에 끝나는 단계는 아닙니다. 순서를 바꾸면 앞뒤 장면의 의미가 달라지고, 그러면 또 다른 장면이 필요 없어지거나 새로 필요해집니다. 러프컷은 대개 여러 버전을 거치고, 영화의 길이가 가장 크게 줄어드는 것도 이 반복 동안입니다. 두 시간 안팎이라는 러닝타임의 기준에 가까워지는 것도 대개 이 무렵입니다.

 

파인컷은 프레임을 다듬는 단계

장면의 순서와 개수가 정해지면 작업의 단위가 컷으로 내려옵니다. 파인컷은 각 컷이 어디서 들어오고 어디서 나가는지를 프레임 단위로 다듬는 편집본입니다. 인물이 말을 마친 뒤 얼마나 더 머물지, 리액션을 언제 넣을지, 대사를 다음 컷으로 얼마나 겹칠지가 이때 정해집니다.

이 때문에 파인컷은 장면 순서도 이야기도 그대로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바뀐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두 버전으로 이어 보면 호흡이 확연히 다른데, 한 컷에서 두세 프레임씩 덜어낸 것이 장면 전체에 쌓이면 관객이 느끼는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책에서는 세 단계가 차례로 나오지만, 편집실에서 버전을 부를 때 이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습니다. 처음 내부 시사에 거는 버전을 1차 시사본이라 부르고, 그다음부터는 편집본에 날짜를 붙여 구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단계 안에서도 버전이 여러 번 바뀌기 때문에 날짜로 적어야 어느 편집본인지 정확히 가리킬 수 있습니다.

'파인'이라는 말의 쓰임도 업계마다 다릅니다. 드라마 쪽에서는 파인컷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영화 편집실에서는 같은 순간을 '락을 건다'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파인컷과 락컷을 굳이 나누지 않고, 하나의 편집본이 잠기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으로 보는 편입니다.

 

위쪽 회색 막대가 화면 가운데를 조금 지난 곳에서 끝나고, 그 끝에서 내려온 세로선 바로 그 지점부터 아래쪽 주황색 막대가 오른쪽 끝까지 이어지는 타임라인 도식
화면이 잠긴 다음에야 소리와 색이 제자리를 찾는 순서

화면을 잠그는 락컷과 그 권한

파인컷이 더 이상 바뀌지 않게 되면 그 편집본을 락컷이라 부릅니다. 화면을 잠갔다는 뜻이고, 같은 상태를 픽처락이라고도 합니다. 락컷 이후에는 컷의 길이가 한 프레임도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사운드 믹스, 색 보정, 시각효과 같은 촬영이 끝난 뒤의 후반 공정이 본격적으로 돌아갑니다. 이 시점에 컷을 다시 건드리면 그 뒤 공정을 전부 다시 맞춰야 합니다.

다만 후반팀에 편집본을 넘기는 시점은 후반 일정에 맞춰 정해집니다. 일정에 따라 파인컷 상태로 넘기기도 하고, 락을 건 뒤에 넘기기도 합니다. VFX가 중심이 되는 장면은 작업 기간이 길어서, 러프컷 단계에서 해당 장면만 먼저 넘겨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락컷을 둘러싼 또 하나의 문제는 권한입니다.

누가 락컷을 확정하느냐, 즉 최종 편집권을 말합니다. 영어에서는 이 권한도 파이널컷이라고 부르는데, 미국 감독조합(DGA)의 극장용 장편 권리 요약에는 최종 편집권을 가진 사람을 계약서에 미리 적도록 되어 있습니다. 감독에게는 10주 또는 예정된 촬영일 이틀당 편집 하루 중 더 긴 기간의 감독판 편집 기간을 보장합니다. 이때의 감독판은 극장에 따로 거는 감독판과 다른 개념으로 감독이 자기 버전을 완성하는 편집 단계이고, 이 기간에는 누구도 따로 편집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감독판 기간을 보장받는 것과 최종 편집권을 갖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감독이 자기 버전을 완성해도 마지막 결정은 계약서에 적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락컷이 나온 뒤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사 반응이나 상영 조건 때문에 잠근 화면을 다시 여는 일도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러프컷, 파인컷, 락컷은 편집의 단위가 장면에서 컷으로, 컷에서 프레임으로 내려가는 순서입니다. 어셈블리에서 빠진 것을 확인하고, 러프컷에서 이야기의 구조를, 파인컷에서 호흡을 정한 뒤, 락컷에서 그 결과를 잠급니다. 락컷에 최종 편집권 문제가 따라붙는 것도, 결국 화면을 잠그는 일이 곧 영화를 확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이 보는 것은 락컷 하나지만, 그 안에는 어셈블리부터 이어진 선택이 전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락컷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사운드와 색을 맡은 후반팀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저는 후반팀에 락컷을 보내는 날을 사실상 편집이 마무리되는 날로 봅니다. '락을 건다'는 말이 편집실에서 유독 무겁게 들리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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